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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ve #03

정림건축 베스트7을 논하다

2015년과 2016년 두 차례 정림건축 베스트7을 선정했다.


정림건축에서 수행한 한 해의 성과를 놓고 디자인 파트너 간의 토론을 벌여 탁월한 일곱 작품을 뽑는다. 기준은 회사의 핵심가치(사람, 신뢰, 함께, 탁월, 지속)에 바탕을 둔다. 이번 글에서는 토론 과정과 결과를 통해 나타난 정림건축의 디자인 성향과 설계 프로세스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보고자 한다. 정림건축은 올해로 창립 50년을 맞았다. 국내 대표설계사무소로서 정림건축이 표방하는 ‘건강한 건축’은 보편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다. 건축이 너무 어렵게 설명되는 것을 경계하되, 담백하고 진지하게 건축에 임한다. 들뜬 감성을 자제하고, 이성을 존중한다. 모든 창조 작업에 전위(avant-garde)와 후위(arrieregarde)가 있다면, 정림건축은 든든하고 원숙한 후위에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특히 국내에서는 건축물 디자인 소개 글에 형상을 설명하는 주제가 덧붙는 경우가 많다. 반면, 흥미롭게도 2016년 베스트7 작품 대부분은 구상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다. 구조와 재료, 디테일, 공간 경험 등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가치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추상의 순수함을 추구하고, 본래의 용도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지는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가치와 다르지 않다. 먼저 몇 작품을 함께 살펴보며 정림건축의 모더니즘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말라위 대양 루크 메디컬 센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마스터플랜 구성 방식과 경사지 활용, 현지 생산 자재 사용이다. 기존 건물과 미래 증축을 고려해 기능적인 직교 그리드 위에 마스터플랜의 큰 그림을 그렸다. 고저차가 있는 땅의 레벨을 보존하며 건물을 놓고, 각 건물 동의 스카이라인을 단정하게 서로 맞추었다. 매스가 둘러싸고 있는 중정에서 높고 낮은 땅의 흐름은 건축적 산책로를 만든다. 곳곳에 마련된 필로티는 중정을 서로 연결하고, 오브제로서 건물들은 백색으로 빛난다.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건축 원칙이 건물에 녹아 있다. 토론 당시 말라위 지역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전년도 베스트7으로 선정된 콩고 국립박물관 설계는 현지 전통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경사지붕과 전통문양을 넣은 경우여서 이번 말라위 대양 루크 메디컬 센터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현대해상 하이비전센터는 모더니즘 원칙을 한국적으로 적용한 사례이다. 전형적인 경사 대지에 건축과 자연의 관계 맺음은 대단히 이성적이다. 건물 상부의 강렬한 수평선은 여러 단의 레벨이 교차하는 자연의 모습을 단단히 아우르면서 건축과 자연의 밸런스를 조절한다. 빌라 사보아가 넓은 정원을 배경으로 빛나는 하나의 오브제라고 한다면, 현대해상 하이비전센터는 고요한 건축물 안에 중정과 정원을 담아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신영증권사옥 리모델링과 창원 한마음병원은 건물의 본질적 기능과 효율성 개선에 대한 해결책을 밀도 있게 제시한다. 신영증권사옥은 짙은 색의 석재를 외장재로 사용해 균일하고 안정된 인상을 구현하면서 무거움과 가벼움, 열림과 닫힘의 디테일을 능숙하게 조절해 엄격하고 기능적인 건물에 우아한 감각적 퀄리티를 부여한다. 한마음병원에서는 각 건물의 성격과 내부 기능이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창호와 커튼월로 투영되는 바우하우스의 구성 방식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건축에서 모더니즘은 ‘현대적’이라는 사전적 의미 이외에 특정한 시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칫 시대에 뒤떨어진 특정 사조에 정체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베스트7은 모더니즘의 고전적 어휘와 구별되는 두 가지 양상을 나타낸다.

 

 

 

 

첫째는 장소성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거주하기 위한 기계”로 표현했다. 효율과 논리에 충실한 기계는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느 장소에서든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국제주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스트7은 장소성과 대지의 맥락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한다. 대구은행 제2본점은 금융시설이라는 폐쇄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교류하는 네 개의 길을 만들고, 지역과 강한 관계를 맺는 장소가 되었다. 현대 하이비전센터 역시 설계의 목표를 “과장된 형태나 인테리어를 지양하고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하나의 장소를 만드는 데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 위례신도시 C1-3블록 주상복합은 커뮤니티 활성화를 통한 공공성 기여를 중요 과제로 지정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노베이션이다. 막대한 자원이 소요되는 대형 건물에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 의식과 확신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대구은행 제2본점은 오카테크를 주요 외장재로 사용했다. 부드러운 상부 매스는 블랙의 저층부와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대기에 녹아 드는 듯한 미학적 효과가 뛰어나다. 또 주변 단지와의 시선 간섭을 방지하는 기능적 효과를 세련되게 해결했다. 이응노 미술관의 백색 콘크리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백색 U글라스처럼 새로운 재료를 통해 백색모더니즘이 시대적으로 진화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지금까지 베스트7의 모더니즘적 성향 및 그와 차별되는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스타필드 하남은 산, 강물, 조약돌 같은 구상적 요소들을 모티브로 스토리텔링을 기초로 한 디자인을 전개한다. 보편적인 논리와 합리적 실용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적 이상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다. 또한 대중적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쇼핑몰, 국내 최대 천창 면적이라는 기록들은 소비자의 동선과 소비 행태, 공간에서의 심리 등 치밀한 분석을 통해 궁극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듯 친근한 공간 구성, 세밀하게 연구된 이용자의 행태 분석 등 스타필드의 가장 뛰어난 덕목은 대중성이다. 건축가의 주관과 의지는 대중성을 고양하도록 발휘되었다. 표피적이고 통속적이라는 선입견 아래 작품으로서 위상을 획득하기 힘들었던 상업시설이 최고 작업으로 선택된 것은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스타필드의 완성도에 가장 큰 공로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양한 디자인 실험에 도전하는 정림건축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모더니즘의 이성적·계몽적·이분법적 사고는 여러 차례 전복의 시도를 겪었다. 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강력한 담론으로 평균성과 보편성을 지니려는 성향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왓킨은 르 코르뷔지에와 지그프리드 기디온 등의 제반 이론이 내포한 윤리적, 기계론적 포퓰리즘을 비판하고, 콜린 로우는 근대건축에 잠재한 매너리즘을 경계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오랜 공방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편적인 상식은 자칫 배타적일 수 있고 익숙함에 머물다 보면 더 이상 진전 없는 문화의 결정화 현상에 이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현대적 의미가 박제화되지 않고 살아 확장되려면 다양한 창의적 노력이 잇따라야 한다. 안소니 비들러가 말한 것처럼 “실험과 내적 탐문에 바탕을 둔 재평가와 혁신의 지속적 기획으로 모더니티를 추구”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바라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는 건축사사무소로서 정림건축은 전통과 아방가르드, 객관성과 주관성,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으로 더 넓게 창작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현철, “정림건축 베스트7을 논하다”,《2017 정림건축 연감집》 발췌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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