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이냐 집중이냐?
“Like cities, hospitals are never finished… (병원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완성되는 법이 없다. Stephen Kendall)”
서울이란 도시가 한 번이라도 완성된 적이 있을까요? 병원 역시 도시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병원은 늘 어디선가는 증축과 리모델링 공사로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병원 기능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혁신(innovation)보다는 진화(evolution)라고나 할까요, 대부분은 이미 있던 기능들이 분화되고 통합되는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최근 병원건축의 추세를 이러한 병원공간의 ‘분산’과 ‘집중’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1. 분산 (Decentralization)
먼저 ‘분산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병원에서 기능을 분산화하는 요소들은 대개 환자 서비스와 관련됩니다. 즉 서비스 포인트를 분산시킴으로써 환자와 더 가깝게 배치하여 환자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죠.
1) NS(간호 스테이션) 분산화
최근 병동 디자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간호 스테이션의 분산화입니다. 환자와 가깝게 분산 배치함으로써 환자 관찰성을 높이고 긴급상황 시에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확대 시행함에 따라 스테이션의 분산화 추세는 더욱 확산될 전망입니다.
[원주세브란스병원 새병원의 분산형 간호 스테이션 (정림건축)]
그런데 다음으로 필요한 단계는 물류의 분산화입니다. 간호사의 업무는 환자들을 직접 보는 시간보다 약제 및 물류 관련 업무로 소비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따라서 물류 관련 실들도 분산 배치하여 간호사들의 동선량을 실질적으로 줄여야 합니다. 해외병원들처럼 한 병동 내에서도 청결작업실, 오물처리실, 창고류를 몇 개의 세트로 분산 배치하는 것을 고려해봐야 할 시점입니다.
2) 병동별 환자/의료진용 엘리베이터
대개의 병원은 (입원) 환자/의료진용 엘리베이터를 병동층 중앙에 집중하여 배치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방문객 엘리베이터도 인접하여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병동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저층부에 내려가서 이 두 동선을 분리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부다비 클리블랜드 클리닉과 팔로마 메디컬센터 에스콘디도의 병동별 엘리베이터 분리]
해외 병원들을 보면 환자/의료진용 엘리베이터를 층의 중앙이 아니라 각 병동별로 분산시킨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드물지만, 세브란스암병원과 현재 공사가 준비 중인 원주세브란스병원 새병원이 이러한 사례에 속합니다.
이렇게 병동별로 환자/의료진용 엘리베이터를 분산시키면, 우선 병동 내의 환자동선을 단축할 수 있고, 저층부 기능과의 동선 연계도 편리해지고 내원객들과의 동선 분리에도 효과적입니다. 또한 감염병동이나 특수병동을 위한 전용 수직 동선체계를 꾸미기에도 유리합니다. 다만, 저층부 평면 구성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설계 시 적용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해봐야 합니다.
3) 병동 내 원무코너
국내 대형병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외래원무 기능을 분산시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입원원무 기능 역시 병동 내에 분산 배치하는 추세입니다. 환자나 보호자들은 중간수납이나 퇴원 시에 매번 로비층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건 매우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NS 데스크의 일부를 할애하는 방법도 좋지만, 상담이 좀 더 프라이빗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창구 형태의 공간 디자인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남미를 가보니 이곳 병원들에서는 보험 관련 업무들이 복잡하여 병동 내 입원상담창구가 기본적으로 배치되어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래의 스마트 병원에서는 이러한 서비스가 병실 침대로 직접 찾아가는 형태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4) 입원환자용 영상의학과
수술부, 영상의학과, 검사부와 같이 소위 ‘중앙진료’라고 불리는 기능들은 공간과 전문인력이 이원화되고 장비나 설비가 고가이기 때문에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뿐이지, 이상적으로는 입원환자용과 외래환자용이 각각 따로 있으면 환자들에겐 편리합니다.
이제는 환자 편의 측면에 더 무게가 실리면서, 이미 대형병원들이 수술부나 재활의학과 등에 있어 외래용과 입원용을 별도로 분리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상의학과 경우 역시 이미 많이 분산되어 있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장비 관리나 방사선 기사의 운용효율만 고려하여 집중 배치했던 반면, 지금은 수술부, 외래 각과, 응급부, 건진센터 등 여러 곳에 방사선 장비(그리고 방사선 기사)가 분산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위성(satellite) 영상의학과’의 설치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병동 인접한 곳에 ‘위성 영상의학과’를 운영하는 방안은 영상의학과의 부서 확장 전략으로도 편리하고, 입원환자들의 편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합니다. 다만, 고가 장비들의 장비 가동률 역시 중요하기 때문에 외래환자의 접근동선도 고려해야 하고, 오후 시간대 이용이 거의 없는 건진센터용의 영상의학 검사실들과 겸용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합니다.
5) 편의시설 분산화
우리나라 병원의 편의시설들은 대개는 지하1층에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용객 편의나 시설환경 면에서, 또 점차 강화되는 소방안전 면에서도 병원의 편의시설들을 지하에 배치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외국병원들을 보면 편의시설들은 주로 현관 기능(front door function)의 하나로 간주하여 내원객들의 접근이 편리한 로비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선 편의시설의 1층 배치 사례가 매우 드뭅니다. 지상층, 특히 1층은 모든 부서가 눈독 들이는 프리미엄 공간이니까요. 세브란스병원 본관과 양산부산대병원 정도가 로비층에 편의시설을 집중 배치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편의시설을 분산 배치하여 운영하는 병원들도 있습니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옥상정원층에 커피숍을 배치하는가 하면, 세브란스암병원은 4개층에 걸쳐 편의시설이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분산화는 이용객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증진시키는 것은 물론 병원 수익에도 일조하므로 적극적으로 고려해 봄 직합니다.
[편의시설들을 분산 배치한 세브란스암병원 (동우건축)]
2. 집중 (Centralization)
병원에서 집중화하는 요소들은 ‘multi-disciplinary’, 즉 서로 다른 기능들을 통합함으로써 부서 간의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추구하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한편, 이러한 집중화는 서로 중복되는 비효율적 요소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1) AAU (Acuity-adaptable Unit/ 중증도 가변형 병실)
[펜실베니아 대학병원 증축동의 AAU (HDR)]
일반적인 병동 운영의 경우, 환자들은 상태에 따라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또는 그 반대로 병실을 이동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때마다 환자의 낙상 위험이 커진다는 겁니다. 또한 병실 이동에 따른 행정업무나 관리비용도 발생하게 되고요.
AAU(acuity adaptable unit)는 중환자실과 일반병실로 상호 전환될 수 있는 가변형 병실입니다. 따라서 AAU는 환자의 병실 이동을 원천적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연구조사에 따르면, AAU 도입 후 낙상률은 75%, 환자들의 병실 이동률은 97% 감소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환자 만족도의 증가 및 의료진 업무량 해소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나옵니다.
다만, 이러한 병동 운영은 매우 높은 시설투자비 및 운영비를 요구합니다. 특히나 중증도 변화에 따른 적정 인력 운용에도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병동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는, 심장계 환자들과 같이 환자 회복 과정과 이에 따른 평가가 예측 가능한 병동 타입에 어울린다고 합니다.
2) 센터화 외래
외래의 진료과 형태는 개별 외래진료부서들을 장기(organ)나 질환별로 별로 묶어 센터화하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전문화에 대한 요구와 더불어 인구 고령화 추세와 함께 복합질환의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다학제적 접근이 점점 더 요구되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센터라 할지라도 모두 같은 센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관련 외래진료 부서들의 통합은 물론, 관련 검사실까지도 포함한 진정한 ‘다학제형 센터’가 있는가 하면, 통합의 시너지 효과는 그다지 없으면서 마케팅 목적으로 만들어 놓는 명목상의 센터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센터 구성 시에는 개개 센터별로 기능과 목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Interventional Platform (통합형 수술부)
미국 병원들의 수술부 구성에 있어 가장 강력한 추세는 ‘통합형 수술부’입니다. 통합형 수술부란 수술부, 심혈관 촬영실, 내시경실이 이르기까지 침습적 수술과 시술의 기능들을 한곳에 통합 배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점차 거의 모든 수술/시술실에 첨단 영상의학 장비가 설치되는 추세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Interventional Platform의 개념]
이 시스템의 장점은 서로 다른 부서 간의 다학제적인 협력을 가능케 하고, 응급상황에서 신속하고 안전한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또한 운영 측면에서도 전처치실(pre-op)과 회복실을 공유함으로써 병상들을 융통성 있게 운영할 수 있다는 점, 물류 시스템이나 직원탈의실 같은 부속실들도 각각의 중복 없이 경제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더해집니다.
[팔로마 메디컬센터 에스콘디도의 통합형 수술부 (CO Architects)]
이러한 평면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병원 운영이나 부서 체제의 혁신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사일로(silo)처럼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부서들을 통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IUSS (immediate use steam sterilization)
원래 수술부의 부소독실(sub-sterile)들의 용도는 간단한 수술 도구들의 ‘긴급(flash) 소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술 도구들은 매우 섬세하고 복잡해서, 오히려 중앙소독부로부터 공급받는 편이 훨씬 더 신속할 뿐만 아니라, 더 청결하고 전문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병원설계 기준인 FGI(facility guide institute)에서는 더 이상 부소독실의 설치를 권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그 대안으로 제안된 것은 IUSS(immediate use steam sterilization)로서, 수술부 내에 설치되는 ‘통합소독실’입니다. 이 시설은 보다 고도화된 장비와 전문인력으로 운영됩니다.
실제로 운영 결과, 초기 투자비뿐만 아니라 운영비 역시 상당히 절감할 수 있는 것을 알려졌습니다. 특히나 case cart system의 적용률이 낮은 국내 병원들에서는 이러한 ‘통합소독실’ 형태가 훨씬 더 유리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5) 교수연구실 집중배치
[중앙대광명병원 교수연구실 내의 공용연구공간 (간삼건축)]
기존 병원들의 교수연구실들은 각 부서별로 배치되는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병동에 배치하는 경우에도 층별로 분산 배치되고요.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분산형 배치보다 한 층에 통합 배치하여 부서 간의 소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사례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직접 채광이 되지 않는 안쪽 공간에는 요새 트렌디한 공유 오피스형 연구실이나 회의실들을 배치하기도 합니다.
시설관리 측면에서도, 한군데로 모음으로써 이렇듯 제법 큰 공간으로 확보해 놓으면 향후 이 공간을 나중에 의료기능으로 전환한다거나, 병원 리모델링 시 부서의 임시 이전공간으로 활용하는 등 예비지(reserve space) 개념으로 활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환자들은 좀 더 편해져야 하고, 의료진은 서로 좀 더 소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래의 병원들이 기능의 “분산과 집중”을 통해 추구해야 할 핵심입니다. 그런데 시설을 손대기에 앞서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만큼 우리의 병원 시스템은 충분히 유연한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집중되어 있던 시설을 환자 안전과 편의를 위해 ‘분산’시킬 의지가 있습니까? 효율적 시스템 구축을 위해 부서별로 중복되어 있던 기능들을 서로 양보하여 ‘통합’할 용기가 있습니까?
“변화를 원하십니까?”
“그럼 변화하고 싶으신 분은?”
글. 박원배 (정림건축 / 메디컬플래너)
출처. "헬스케어 디자인 매거진" MAGAZINE HD 2022 12월호 <https://magazine-hd.kr/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