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협의(User Meeting), 어떻게 할 것인가?
병원설계 과정의 특징 중 하나는 ‘참여설계(participatory design)’에 있는데, 종적으로 횡적으로 얽혀있는 수많은 사람의 각기 다른 관점과 의견을 어떻게 잘 수렴하느냐에 따라 건물의 최종 완성도는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병원설계에 있어 건축주 협의는 병원 리더십을 대상으로 하는 운영진 협의, 기획팀과 시설팀 등과 하는 실무진 협의, 그리고 ‘사용자 협의(user meeting)’라고 불리는 병원 각 부서와 진행하는 협의가 있습니다. 특히 대형 종합병원의 경우, 진료부서와 지원부서 합쳐서 사용자 협의에서 만나야 할 부서는 수십 개에 달합니다.
물론 모든 건축물의 설계과정에서 건축주 협의는 중요합니다만, 병원설계 과정에 있어 ‘사용자 협의’는 특히나 중요하고 그 진행과정 역시 독특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병원설계 과정의 ‘꽃’은 사용자 협의에 있다”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에서는 설계자들을 위하여 병원설계 시 ‘사용자 협의’를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열 가지 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사전작업(pre-design) 내용을 확인하라.
설계자에게 있어서는 설계용역 착수가 프로젝트의 시작일지는 모르나, 건축주는 이미 오래전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획단계(planning phase)라고 부릅니다. 먼저 이러한 설계 앞단에서 어떤 내용이 다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계자에게 전달되는 소위 ‘설계지침서’에는 병원에서 이제까지 논의해왔던 수많은 결정들의 일부분만 담겨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침서의 내용들은 대부분 큰 목표와 운영진 의견 위주로 정해져 있습니다. 각 부서의 의견이나 세부 사항들은 지금부터 사용자 협의를 통해 채워 나가야 합니다.
한편 사전준비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건축주는 전문 컨설팅의 도움을 받아 사용자 의견들도 반영한 비교적 충실한 기획 결과물을 마련해 놓습니다. 그래서 워크샵이나 벤치마킹 투어, 전문가 강연 등을 통해 전 직원이 프로젝트를 위한 비전과 목표를 공유합니다.
이렇게 설계 이전의 과정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병원 프로젝트에 있어 기획과정이 부실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실한 기획과정은 사용자 협의는 물론 설계진행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2. 오리엔테이션을 행하라.
본격적인 부서별 사용자 협의에 앞서, 전 부서의 담당자들을 모아놓고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는 게 좋습니다. 안 그러면 부서 협의 때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야 합니다.
오리엔테이션의 목표는, 앞으로 협의에서 만날 사용자들과의 ice breaking과 사용자 협의에 임할 때 적극적인 마인드 세팅을 마련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설계자 나름대로 일련의 세미나나 워크숍을 프로그램에 포함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설계자가 이 분야 전문가로서의 신뢰감을 심어주는 것과, 사용자들은 설계과정의 단순한 대상이 아닌 파트너임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계자 역시 프로젝트의 파트너로서 사용자들의 요구에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일 것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3. 각 부서별 담당자(책임자)를 선정하라.
사용자 협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건축주 측 협의 주체를 정해야 합니다. 이들은 대개 건립추진위 소속의 병원 기획팀과 시설팀 관련자인데, 이들의 역할은 부서별 협의를 주선하고 운영진과 실무진을 대표하여 현장에서 이견을 조율을 하는 것입니다.
사용자측에게도 부서별 책임자 선정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이들 역시 건립추진위를 만들면서 이미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결국은 그 부서를 대표하여 단계별 승인을 할 사람들입니다.
한편 병동부, 중환자부, 외래진료부, 수술부와 같이 다수의 부서가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분과위를 구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각 부서를 개별적으로 협의해서는 안 되고, 분과위 내부에서 합의를 이룬 의견을 가지고 사용자 협의에 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4. 단계별 일정계획을 잡으라.
일반적으로 사용자 협의 일정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 협의는 단선 레이아웃의 결정, 2단계는 장비가구 배치도 및 Room Data 등 세부 기술적 사항 결정, 마지막 3단계는 사용자 최종승인 협의 등입니다.
그런데 3단계 협의를 제외하고는 1, 2단계 협의가 한 번에 끝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불필요한 협의 회수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매 협의 전에 자료를 미리 배포하여 사용자들이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1단계 협의 때, 복잡한 부서들은 평면계획 방향에 대한 여러 대안이 먼저 검토된 후에야 단선 평면이 결정됩니다. 반면에, 작거나 덜 복잡한 부서들은 레이아웃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다음 단계 협의내용을 미리 앞당겨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2단계 협의에서는 장비와 가구, 집기는 물론 출입문의 종류 같은 세부적인 사항들도 결정해야 하므로 내용이 더욱 복잡해집니다. 기계, 전기, 통신 분야의 협의 역시 중요합니다. 이들은 평면 협의 때 함께 할 경우도 있고 별도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5. 사용자 승인은 단계별로 받으라.
병원설계 과정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끊임없는 설계변경의 연속입니다. 물론 이는 건축주의 필요에 따라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잦은 설계변경은 일정을 뒤처지게 하는 주원인입니다.
계획설계 시 단선 평면계획 상의 변경은 계획의 과정으로서 인정되지만, 레이아웃이 결정된 이후의 평면 변경은 원칙상 설계변경이라는 점을 주지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에서의 장비, 가구를 포함한 세부평면이 확정된 이후로도 끊임없는 변경 요청을 받게 됩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경우가 협의 대상이 실제 최종 사용자(end-user)가 아닌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사용자 협의 과정에서도 결정이 느려지고, 최종 사용자가 정해지게 되면 대규모 설계변경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측의 변경요청은 수시로 발생하는데, 이를 그때그때 반영하다 보면 작업효율도 떨어지고 각 분야별 소통 문제로 설계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단계별 승인이라는 형식적 절차는 불필요한 설계변경을 최소화하고, 변경의 시점을 조절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6. 협의해야 할 사항과 협의하지 말아야 할 사항을 구분하라.
사용자 협의의 진행효율은 무엇보다도 설계자의 경험과 노하우에 달려있습니다. 사용자 협의에서 꼭 다루어야 할 내용과, 실무진 협의나 다른 협의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용자에게서 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또한 ‘의료진은 건축이나 시설 분야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라고 가정해야 합니다. 특히나 설비와 관련된 사항들은 사용자들에게 직접 결정해 달라고 묻는 것은 효율적이지도 않거니와 충실한 답변을 받기도 힘듭니다.
룸데이타 시트(room data sheet) 같은 기술적인 사항은 사용자들에게 빈칸 채워오기식으로 요청할 게 아니라, 설계자가 최신 사례를 중심으로 레퍼런스 시트를 먼저 작성하여 사용자들이 확인하고 수정하는 방법으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반면에 장비 리스트(equipment list) 관련해서는, 사용자들이 현재 시점에서 사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가장 최신의 장비목록을 설계자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직접 작성할 수 없는 경우는 모델명과 판매자 연락처를 알려주면 됩니다.
7. 부서별 특수성을 감안하라.
몇몇 부서들은 협의 진행방식이 다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진단검사의학과, 병리과, 약제과와 같은 검사실류는 설계자가 모든 장비들을 일일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장비가구 배치도를 직접 작성하기가 곤란합니다. 이들 부서는 일차적으로 설계자가 제공하는 평면에다 사용자들이 직접 장비류를 배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영상장비 부서들이나 소독부 같은 장비 중심 부서의 경우, 예전에는 설계자 측이 장비업체들에게 협의 도면을 보내 검수를 부탁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설계자가 직접 요청하는 경우 이들 업체의 협조가 원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용자들에게 부탁하여 장비업체들이 장비 레이아웃을 확인하게끔 요청해야 합니다.
수술실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결정된 평면 레이아웃과 실내입면 등이 수술실 전문업체에 넘어가 상세 디자인이 결정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 협의에서 결정되었던 중요 개념들이 훼손되지 않고 끝까지 유지되는지 설계자는 끝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8. 협의과정에서 의견 충돌은 당연한 것이다.
사용자들은 직접 부서를 운영하는 주체로서 이들의 의견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용자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용자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대개 기존 운영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계자는 여러 다른 병원들 사례나 최신 해외병원 추세를 통한 다양한 대안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계자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특정 병원이나 부서의 특정한 운영방침이나 인력계획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용자 협의에서는 사용자와 설계자의 의견이 상충하는 상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서로가 더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도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최적의 합의를 이루어 냄에 있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과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9. 전체 큰 그림을 염두에 두라.
사용자 협의 시 기능적 해결에만 몰입하다 보면 사용자 측이나 설계자 모두 나무만 바라보다가 숲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즉, 부서의 개별 요구사항에만 치중한 나머지 병원 전체로서 지향하는 목표와 통일성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료효율, 인력절감 같은 눈앞의 현실에만 집중하다 보면, 변화하는 미래에 대한 대비나 그 안에서 근무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소홀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원설계 시 사용자 협의를 포함한 모든 건축주 협의에는 한가지 맹점이 존재합니다. 설계 협의과정 중에서 진작 ‘환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환자중심(patient centeredness)’을 부르짖는데, 환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따라서 의료진들로부터 간접적이나마 환자의 입장을 듣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항상 환자들과 접하는 간호사들의 의견은 특히 소중합니다. 근래에는 ‘서비스 디자인’ 분야가 접목되면서, 환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관찰하여 얻는 데이터가 설계에 반영되는 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10. 다음 프로젝트에 대비하라.
프로젝트의 종료는 사용자나 설계자에게 병원설립에 대한 값진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런데… 병원이나 설계사나 장사 한 번만 할 건 아니겠지요?
이번에 얻은 노하우는 다음 프로젝트에선 개선안으로 발전시켜 적용하고, 다시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선순환을 일으키려면 사용자 협의과정과 그 결과물을 잘 정리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용자 협의 후에는 마킹된 도면, 메모장, 녹취파일 같은 엄청난 양의 미가공 자료가 남게 됩니다. 이 자체로도 단계별 승인을 위한 근거로서는 유용하지만,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남겨둘 자료로서 액기스만 뽑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종 보고서나 회의록들은 이후 아무도 보게 되지 않는 점을 상기한다면, 단 5페이지짜리라 할지라도 남들이 읽어볼 만한 자료를 남기는 게 더 낫습니다. 그리고 사용자와 설계자가 협의한 대로 공간들이 잘 쓰여지고 있는지, 향후 어떠한 점을 개선해야 할지 POE(거주 후 평가, post occupancy evaluation)의 밑거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설계자를 위한 팁이었고, 마지막으로 사용자 협의를 위해 건축주가 준비해야 할 3가지 사항을 알려드리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1) 일정계획을 타이트하게 짜주세요.
병원 측은 사용자 협의가 최단 기일에 몰아서 진행할 수 있게끔 일정을 조율해주어야 합니다. 중간에 빈 시간이 발생하면 실무진 협의를 하거나 협의 내용을 정리해도 되지만, 하루에 한 두개 협의를 하러 병원을 방문하게 된다면 설계자의 시간 낭비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의사분들이 바쁘다구요? 저희도 바쁘답니다.”
2) 협의 공간을 마련해주세요.
사용자 협의 전용 사무실을 배정해주세요. 벽에 전체 도면이나 협의일정표도 걸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제가 경험해본 최고의 장소는 병원장 회의실이었습니다. 의사 결정권자가 바로 옆방에 계시니까요. 최악의 경우는 협의 때마다 각각의 부서를 방문하여 협의하는 방식입니다. “설계자는 보따리장수가 아닙니다.”
3) 간식 좀…
수주일, 수개월에 거쳐서 사용자 협의를 진행하다 보면 설계자의 체력과 멘탈은 한계에 달합니다. 하루종일 종일 협의를 진행하고 일과가 끝나면 그날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다음 날 회의를 준비해야 하고… 회의 장소에 준비된 간식은 설계자들에게 (마음의 양식 같은 것 말고 진짜로) 양식이 됩니다. “배고파요. 당 떨어져 가요…”
글. 박원배 (정림건축 / 메디컬플래너)
출처. "헬스케어 디자인 매거진" MAGAZINE HD 2023 1월호 <https://magazine-hd.kr/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