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ve04
Motive #04

글로벌 시대의 한국성

글로벌 이슈는 모든 분야의 화두이다. 전략, 시각, 기업, 랜드마크 등 모든 것에 글로벌을 붙이는, 말 그대로 글로벌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글로벌 전략, 글로벌 시각, 글로벌 기업, 글로벌 랜드마크….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이 시대에 전통과 한국성의 논의는 생뚱맞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주제로 느껴진다. 그러나 정체성의 문제로 이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정체성의 질문 없이 사는 삶, 인생, 사업, 건축이 문제일 것이다.

 

“한국성이란 무엇인가, 이 시대에 한국성이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전통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나의 밑바탕에 자리 잡은 뿌리는 무엇인가”, “동북아시아 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세계화되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것인가” 등등은 정신없이 변화하는 이 시기에 생각해 볼 매우 중요한 이슈일 수 있다. 지금은 한국성에 매몰돼서 과거 회귀적이 된다거나, 우리의 것을 무시하고 우리를 부정하는 양극단은 지양해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전통성과 세계성을 나눌 정도로 고루하지 않지만, 이 둘을 창의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화두일 수 있다. 이웃 일본이나 중국 건축가들의 행보는 그러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중, 일은 서로 다르지만 동북아시아 인으로서의 공통성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건축가들은 일본성이니 혹은 아시아성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건축에서 그런 색깔과 풍취가 나오니, 우리에게 좋은 탐구 사례가 된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일본은 네 번이나 수상했다. 그 수상 이유도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서양 건축을 서양 사람들보다 더 잘해서가 아니라, 서양식 건축에 일본의 지역성(일본성)을 잘 조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건축계에서 여전히 한국의 대표 건축가로 인정받는 고 김수근과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지역성과 세계성의 조화’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들여다보고 앞으로 우리의 길을 가는 데 단초를 얻어 보기로 한다.

 

김수근은 일본 유학에서 르 코르뷔지에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일본 건축가들의 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박물관 설계로 혹독한 왜색시비 논쟁을 겪는다. 이러한 시련은 김수근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전통건축을 새롭게 탐구하는 길로 매진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서서히 전통에 눈을 뜨게 된다. 그 중심에는 고 최순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과의 만남이 있었다. 이는 김수근의 고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선생과 주말마다 지방에 함께 답사여행을 했다. 일본에서 공부한 탓에 너무나 한국에 어두웠던 젊은 건축가에게 한국의 미를 손수 가르쳐 주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나를 한국의 건축가로 이끌어 주신 분이 선생이라 하겠다. 만일에 최순우 선생님을 못 만났더라면 한국의 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건축가 또는 건축기술자, 일반 설계자로서 머물렀을 것이 틀림없다.” 스승과 제자는 함께 민가를 답사하고 초가를 실측했으며, 전국의 사찰을 누비고 다녔다. 최순우가 김수근을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하는 방법은 독특했다. 무엇이든 강요하지 않고, 힘주지 않으며, 온화하고 소박하며, 자기가 아는 것을 뽐내지 않고, 상대가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별다른 설명도 구체적인 지적도 하지 않으면서 김수근의 눈을 키워주려고 한 것이다. 답사여행을 하면서 김수근은 몇 가지 디자인 원리와 사고를 정리한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팽창주의가 인간성의 상실과 환경 파괴를 초래했다면, 자연과 환경의 요구에 조화를 이루는 절제와 소박을 주장하는 네가티비즘(Negativism), 인간적인 스케일과 적절한 크기의 공간과 형태를 지향하는 신조어인 ‘자갈리즘(Jagalism)’, 그리고 기능이나 효율만을 위한 것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한 여유로운 공간인 궁극 공간(Ultimate Space) 등을 정의 내리고 이를 추구한다. 이러한 사고와 더불어 벽돌이라는 친밀한 재료를 사용하며 자신의 건축을 펼쳐나갔다. 이는 한국 건축사에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주장은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해 허를 찌르는 지혜가 있다. 즉 전통이나 지역성은 형태의 모방이 아닌 정신과 감성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정체성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정체성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형태의 모방은 시대와 불화를 낳고 정신과 감성의 계승은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안도 다다오는 오랜 탐구를 통해 우리에게 좋은 단초를 제공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일본의 정신과 감성은 다음과 같다. 자연과 장소에 대한 경외, 사물 사이의 공백에 의미를 두는 간(間)의 미학, 소재의 존중과 직접적인 대화, 극한까지 간소화하려는 간결의 미의식, 질서를 존중하는 일본의 심정 등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그의 건축을 설명하는 주제어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그는 전통에서 계승해야 할 정신과 감성의 기본이 되는 일본 전통 건축으로 ‘스끼야(數奇室)’와 민가를 들고 있다. 이 둘의 특성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도를 즐기기 위한 ‘스끼야’와 생활을 위한 민가는 그 미감이 구별되지만, 자연에 일체가 되려는 그 정신성은 유사하다. 그는 전체는 생활의 질서를 떠받치고, 부분은 생활의 각 장면을 보다 풍요롭게 한다며 두 차원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이런 오랜 탐구로 그는 일본(동양)과 서양의 대립하고 모순되는 가치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 “이 모순들을 통해서, 우리는 외면상 각각의 공간감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넘어 동양과 서양의 분위기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장소가 그 잠재적인 성격들과 공명하며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나는 나의 작품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이와 같이 상반되는 공간적인 개념들을 하나의 단일한 건축, 그 각각의 개념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건축 속으로 통합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수근의 벽돌 건축에서나 안도 다다오의 노출콘크리트 건축에서 전통 건축의 형태를 모방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성을 잘 반영하면서도 세계에 통하는 보편성을 구현해 냈다. 그리고 우물 안 개구리식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세계 건축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들은 깊은 탐구와 사색을 통해 자신만의 사고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정림건축에서도 이러한 탐구의 일환으로 정림학생건축상의 주제를 여러 해 동안 ‘세계화하는 한국성 건축을 위하여’로 정하고 진행한 바 있다. 오늘도 우리는 시대에 뒤쳐진 형태 논의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탐구의 한걸음을 걸을 필요가 있다. 세계가 인정하는 지역성과 보편성이 어우러진 새 시대의 건축을 향하여….

 

 

황철호, “GLOBALIZING TRADITION OF KOREAN ARCHITECTURE”, 《Junglim Architecture Works 2012》 발췌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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