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 담긴 정림문화
일과 휴식의 균형
건축가는 예술가처럼 창작의 세계에서 탐험하는 일을 즐기고, 정림인 역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본능적으로 쫓는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경쟁의 치열함 속에서도 비즈니스를 넘어 창작의 세계에서 건축의 또 다른 가치를 찾기 위해 실험해 보곤한다. 사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림, 환상, 여유, 낭만, 재미, 실험, 재충전, 꿈, 쉼과 같은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말랑말랑하고 정감 넘치는 요소가 없다면 우리네 삶의 현장은 얼마나 척박해질 것인가? 빠듯한 설계일정과 건조 일변도의 작업은 건축가로서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소멸시켜 결국 이 분야에 오래 종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건축에서 효율과 성과, 이윤추구와 같은 요소와 위에서 열거한 가치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작업은 의미를 가지게 되며 더 큰 시너지가 나올 것이다. 일하고 지치고 쉬고 재충전하고 다시 일하고…. 이렇듯 자연스럽게 일과 휴식은 지속적인 선순환 구조를 가져야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야 창의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따라서 건축가는 스스로 여유와 진정한 쉼을 찾고 재충전할수록 창작의 에너지는 훨씬 더 증폭된다고 본다.
건축가의 창의적인 삶
창작 의욕이 왕성한 건축가들이 일과 휴식을 통해 삶을 항상 신선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어제에 비해 오늘이 생동적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의 변화된 자신을 꿈꾸는 것이다. 건축가에게 일과 휴식은 이분법으로 딱 가르기 쉽지 않다. 일에 몰입하는 자체가 어쩌면 놀이이자 휴식일 때도 많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생활 습관의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해 본다. 첫째, 상상력과 호기심이 가득한 동심의 세계를 붙잡고 사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상상력과 호기심 가득한 세계관처럼, 권위 의식과 고정관념과는 거리를 두는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아는 많은 건축가 동료들의 철없는 듯한 유쾌한 언행도 고정된 가치관에서 벗어나려는 자세 중 하나이다. 둘째, 주변 사물에 대한 애정과 섬세한 관심을 가져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따뜻한 품성과 관찰력을 높일 수 있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또한 그 느낌을 표현하고 기록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 보라. 수첩에 그리거나 휴대전화에 메모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당시 느낌을 고스란히 이끌어내 작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독서와 예술작품 관람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요즘 각광을 받는 인문학은 건축디자인의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질 좋은 거름과도 같다. 사무실 근처에 아라리오 미술관으로 변모한 옛 공간사옥과 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있고 대학로에는 여러 전시장과 문화공연장이 모여 있어 관심만 있다면 언제든 산책 삼아 가 볼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풍부해지고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효능을 체험해보시라. 건축가의 삶이 생선회처럼 찰지고 쫀득쫀득한 ‘날 것(raw)’의 느낌을 유지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일과 쉼의 균형을 통해서 이러한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창의적이고 좋은 건축을 디자인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정림 특유의 여유로운 문화
정림은 창립 후 50년 동안 자랑스러운 건축문화를 일구어왔다. 작품을 통해 도시와 건축에 기여한 것은 물론 공익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공헌과 독특한 정림 내부의 여유로운 문화가 그것이다. 특히 건축설계를 통한 사회봉사와 재능기부로 이러한 공유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임직원이 직접 참여하며 건강한 사내문화로 자리잡은 상생과 나눔의 사례로는 ‘사랑의 집 짓기 운동’ 으로 이미 잘 알려진 해비타트가 있다.
또 건축을 통한 사회봉사, 건축과 문화예술의 교류, 건축의 대중화 활동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건축문화의 지평을 넓혀가는 정림건축문화 재단의 활동도 크게 한몫을 하고 있다. 이밖에 일사일촌 결연을 통해 정림 가족에게는 무공해 농촌체험의 기회를, 농촌에는 생활의 활력을 제공하여 실질적인 농촌사랑운동으로 발전하는 상생의 모범사례도 진행중이다. 정림건축에는 건축가의 창의성을 북돋기 위하여 쉼과 여유, 그리고 재충전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그 중에 지난 31년 동안 꾸준히 시행해 온 ‘전통건축 답사’는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성숙한 답사문화로 자리 잡았다. 또한 20개에 가까운 동아리가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중에는 운동이나 취미동아리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학술연구동아리도 자발적으로 등록되어 있다. 일과 휴식의 균형뿐 아니라 정림인의 소통과 단합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겨냥하고 있다. 휴식의 중요성을 생활에 담아 매주 수요일은 ‘가족愛 날’로 정해 연장근무가 습관화되지 않도록 하고, 해외답사 프로그램인 ‘꽃보다 정림’도 사내직원들에게 인기만점인 프로그램이다. 이밖에도 디자인 리뷰나 세미나, 작품 전시처럼 업무에 직접 도움이 될 수 있는 디자인 문화도 회사의 규모에 걸맞게 시스템으로 갖추어져 있다.
정림건축이 한국건축계의 리더로 성장한 이유는 수준 높은 설계를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한질주로 내딛는 설계시장의 경쟁 속에서도 따뜻한 품성을 잃지 않고 사회의 약자를 위해 정림인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재능기부로 노력한 선배들과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 헌신하는 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림문화에 담긴 정림인 특유의 여유와 멋스러움, 그리고 상생의 정신은 앞으로도 꾸준히 계승되어야 하는 철학이다.
행복한 일터에서 더불어 함께
지난 몇 년간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하여 안타깝게도 유난히 재난사고가 많았고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컸었다. 매스컴을 비롯한 모든 매체와 기업들마저 경쟁본능으로 빠르게 질주하는 동안 미처 챙겨야 할 안전의식과 사고예방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결과라고 본다. 정림은 건축계의 선두기업임을 자부하며 성장해 왔다. 그리고 금융위기 이후 설계시장의 경기침체가 해마다 가중되는 시기에 600명에 이르는 직원과 그 몇 배가 되는 가족의 삶이 이곳에 담겨 있음을 생각하면 회사의 생존이 절체절명의 당면과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만이 우리가 함께 동고동락하는 이유는 아니다. 건축을 통해 보다 건강한 공간 환경을 꿈꾸고, 상생하는 세상을 만들어 약자를 돌보고 사회에 공헌하는 자랑스러운 조직으로 만들어가며, 직원들에게는 행복한 일터요, 건축계에서는 닮고싶은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장기적인 목표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정교하게 짜놓은 일정과 목표를 바라보며 분주하게 돌아가는 업무가 시작된다. 설계 납품일, 현상설계 마감일을 목전에 두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 급박한 상황과 바쁜 현실에서 쉼과 여유를 이야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비록 이런 일상이 매일매일 반복된다 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여유와 멋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면 우리들은 이 길을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공터 한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중략)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중략)
김종현 作 ‘폐(廢)타이어’ 중에서....
임진우, “쉼표에 담긴 정림문화”, 《2015 정림건축 연감집》 발췌 재구성